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평가 (문단 편집) ==== 회남은 비어있었는가? ==== '''장료가 회남에서 형주로 빠졌으므로''' 이 틈을 노려 북벌을 했으면 합비를 얻는데 성공했을 것이란 말은 사건의 선후 관계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애초에 조조가 장료를 번성으로 돌린 것은 '''손권과 밀약을 맺은 이후'''이다. 만약 형주를 노리지 않고 합비를 노렸으면 장료를 합비에서 뺄 일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손권이 밀약을 지키지 않고 합비를 공격했다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조조군은 '''장료가 번성에 도착하기 전에 서황이 자력으로 번성의 포위를 풀었다.''' 그리고 조인이 관우를 추격하지 않은 것은 혹시나 관우가 손권과 협력할 가능성을 염려해서였다. >장수들은 모두 좋아하였으며, 곧 땅속으로 길을 파고, 화살을 날려 조인에게 편지를 보내서 몇 차례 소식을 연락하였다. 북쪽의 지원군 또한 도착하여 힘을 합쳐 크게 싸웠다. 관우의 군사가 물러난 후, 촉나라의 배가 면수(沔水)를 점거하여 양양(襄陽)은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그때 손권(孫權)이 관우의 치중(輜重)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퇴각하여 남쪽으로 돌아갔다. 조인은 장수들을 모아서 상의했는데, 모두 이렇게 말했다. > >“지금 관우는 위기에 처해 있으니, 쫓아가면 반드시 체포할 수 있습니다.” > >조엄이 말했다. > >“손권은 관우의 연이은 싸움의 어려움을 틈타서 그 배후를 습격하려고 했지만, 관우가 구원병을 이끌고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 군대가 양쪽 군대가 피로해진 틈을 타서 공격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순종하는 말로 봉공(奉公)을 원하고 나와서는 틈을 타고 변화를 이용하여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려고 할 뿐입니다. '''지금 관우는 이미 고립되어 달아났지만, 또 그가 손권의 심복이 될 걱정거리는 여전히 있습니다. 만일 패하여 달아난 자를 깊숙이 추격한다면, 손권은 관우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우리에게 재앙을 일으킬 것입니다.''' 왕께서는 반드시 이 점을 깊이 헤아리셔야만 됩니다.” > >조인은 그래서 전투태세를 풀었다. 태조는 관우가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들이 추격할 것을 걱정하여 과연 긴급히 조인에게 칙령을 보냈다. 그것은 조엄의 계책과 같았다. >----- >『삼국지』「조엄전」 만약 손권군이 합비를 공격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 형주 방면의 군사를 합비로 돌린다. 이 경우 삼국의 정세는 관우의 양번 공략 이전 상태로 돌아가고 조조와 손권이 회남에서 대치하게 된다. * 조인군은 남하하고 별개로 합비로 지원군을 보낸다. 이 경우 조조군이 강릉을 탈환하며 합비를 지켜낼 수 있다. 합비의 공략은 비교적 쉬워지겠지만 장료는 고작 7천의 병사로 합비를 지킨 이력이 있다. 어느 쪽이든 손권에게는 안좋은 결과다. 반면 형주를 공격하면 강릉 이남을 장악할 수 있고 남형주의 인구는 강동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았다. 합비를 먹었어도 문제다. 중국은 서고동저의 지형으로 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회남과 강동을 점유해도 회수와 장강은 서쪽에서 흘러오기 때문에 수도권이 그대로 직격된다. 심지어 회수의 지류들은 서북쪽에서 동남쪽 회수로 흘러온다. 이런 지형적인 이유로 인해 중국사에서 동과 서가 대립할 때 [[성한]]과 [[동진]]마냥 국력의 차이가 큰 것이 아니라면 항상 서쪽이 승리했다. 전국시대에는 형주의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와 [[월나라]]가 그랬으며 [[진(영성)|진나라]]와 초나라가 그랬다. 남북조 시대를 마무리한 [[북주]] 역시 서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몽골이 남송을 점령할 때도 양양이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무너졌다. 회남 지역은 북쪽에서의 침입을 막을 때 유용하지 서쪽에서 오는 공격에는 취약하다. 그 예시가 전국시대 진나라의 멸초전인데, 진나라는 회수를 타고 내려가 초나라의 수도인 수춘을 점령한 후, 강동의 잔존 세력들을 토벌했다. 소위 장강 방어선이라 부르는 전략과 회남 지역은 어디까지나 남북으로 갈라져 대치할 때의 전략이다. 동서로 갈라져 대치할 때 강동 정권이 회남을 차지하는 것은 전혀 방어선을 형성할 수 없다. 관우가 손권을 대하던 태도를 보았을 때, 손권은 관우가 양번을 점령하고 유비의 세력이 강해져도 유비군이 본인들과 우호적일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이미 익양대치 때 무력충돌 경험이 있는 것이 양 세력이다. 유비가 우호적으로 나오면 다행이지만 적대적으로 나오면 손오 정권의 목숨은 위태롭다. 조조와의 대치는 남북대치이지만 유비와의 대치는 동서대치이기 때문이다. 첫째, 장료는 양양까지 가지도 않았다. 둘째, 여몽의 환성 공략은 여몽과 감녕의 활약으로 순식간에 끝냈기에 장료가 구원오기 전에 처리 가능했던 것이지 조금만 늘어졌으면 합비 공격과 같은 양상이 되는 상황이다. 이 말은 합비를 환성처럼 재빠르게 점령하지 못한다면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애초에 수춘-합비 거리보다 합비-환 거리가 훨씬 멀다. 환은 전혀 합비의 근처가 아니다. 셋째, 합비는 제갈각의 20만 대군을 상대로 지원군 없이 100일 넘게 지킨 전적이 있다. 넷째, 환성 둔전은 243년에 제갈각도 했지만 사마의가 정벌하러 오자 죄다 불태워버리고 시상으로 물러난 곳이다. 다섯째, 장료는 마피에서 조조와 회합했는데, 마피에서는 여수를 따라 회수로 들어가 재빠르게 합비까지 귀환할 수 있다. 반면 합비에서 환까지 가기 위해선 장강을 장악하지 못한 조조군으로서는 육로로 가야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강도 없다. 진군속도가 훨씬 더딜 수밖에 없다. 여섯째, 합비를 먹는다 해도 이미 관우가 번성에서 털린 시점에서 조조군의 주력은 합비로 몰려올 수밖에 없다. 조조군에게 있어 환성의 입지와 합비의 입지는 결코 같지 않다. 합비가 아군의 최전선이라면 환성은 적진 한복판에 있는 거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둘은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제대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